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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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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바오로 1세는 1978년 8월 26일부터 9월 28일까지 재위한 제263대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이다. 그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요한 바오로’라는 이중 교황명을 사용했으며, 교황 즉위식을 간소화하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미소 교황'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33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심근경색으로 인한 자연사로 발표되었으나,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2022년 시복되어 복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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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한 바오로 1세
1978년 사진
이름요한 바오로 1세
본명알비노 루치아니
로마자 표기Albino Luciani
별칭미소짓는 교황
로마자 표기Il Papa del Sorriso
하느님의 미소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Il Sorriso di Dio
출생일1912년 10월 17일
출생지이탈리아 왕국, 베네토 주, 벨루노 현, 카날레 다고르도
사망일1978년 9월 28일
사망 장소바티칸 시국, 사도 궁전
서명
문장
교황 정보
직책로마 교구 주교
재임 시작1978년 8월 26일
재임 종료1978년 9월 28일
선임자바오로 6세
후임자요한 바오로 2세
서품1935년 7월 7일
주교 서임1958년 12월 27일
추기경 서임1973년 3월 5일
사목 표어(겸손)
기념일8월 26일
숭배 대상로마 가톨릭 교회
시복일2022년 9월 4일
시복 장소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광장
시복 주관자프란치스코
상징교황 예복
팔리움
수호 성인교리 교육자
경력
주요 경력벨루노 교구 대리
비토리오 베네토 교구 주교 (1958–1969)
베네치아 총대주교 (1969–1978)
이탈리아 주교회의 부의장 (1972–1976)
산 마르코 에반젤리스타 알 캄피돌리오 성당 추기경 사제 (1973–1978)
교육
학력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PhD)

2. 생애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본명은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it)로, 1912년 10월 17일 이탈리아 북부 벨루노현의 카날레다고르도에서 벽돌공인 아버지 조반니 루치아니와 어머니 보르톨라 탄콘 사이에서 태어났다.[10]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서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0세 때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사회주의 성향의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을 지지하며 "노동자들의 편에 서는 사제가 되라"고 당부했다.[11]

1923년 펠트레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벨루노의 대신학교로 옮겼다. 1935년 7월 7일 사제로 서품받았으며, 1937년에는 벨루노 대신학교의 교수 겸 부학장이 되어 교의신학, 도덕 신학, 교회법 등을 가르쳤다.[10][13] 1947년 로마의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0]

1958년 12월 15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비토리오베네토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교황에게 직접 주교 서품을 받았다.[10] 그는 '겸손'(Humilitas)을 사목 표어로 삼고 "가르치는 자이자 섬기는 자"가 되고자 했다.[11]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회기에 참석하며 교회의 현대화 노력에 동참했다.[15]

1969년 12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10] 베네치아에서 그는 빈곤층과 장애인 구제, 개발도상국 지원 등에 힘썼으며, 겸손하고 소박한 생활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1973년 3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78년 8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열린 콘클라베에서, 루치아니 추기경은 8월 26일 네 번째 투표 만에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91] 그는 선임 교황들의 업적을 잇겠다는 의미로 교황 요한 23세교황 바오로 6세의 이름을 합쳐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요한 바오로'''라는 이중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하고, 스스로 '''1세'''를 붙였다.[91] 그의 온화하고 소박한 모습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Il Papa del Sorriso|일 파파 델 소리소it (미소 교황)라는 애칭으로 불렸다.[99]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알비노 루치아니는 1912년 10월 17일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벨루노현 카날레다고르도(당시 포르노디카날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벽돌공인 조반니 루치아니(1872년경 ~ 1952년)였고, 어머니는 보르톨라 탄콘(1879년경 ~ 1947년[10] 또는 1948년)이었다. 루치아니에게는 페데리코(1915년 ~ 1916년), 에도아르도(1917년 ~ 2008년) 두 남동생과 안토니아(1920년 ~ 2010년)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태어난 당일, 생명이 위독하다고 여겨져 산파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이틀 후 본당에서 정식 세례를 받았다.[10]

어린 알비노 루치아니, 1922–23년경


루치아니는 활발한 아이였으며,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깊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계절 노동자로 일하다 나중에 정규직을 얻었지만 가정 형편은 매우 가난했다. 1922년, 10세 때 카푸친 수사의 사순절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조반니는 아들의 결심을 허락하며 "네가 사제가 되면 노동자들의 편에 서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편에 서셨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당부했다.[11]

1923년 루치아니는 펠트레의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 교사들은 그를 ‘대단히 기운이 넘치는 학생’으로 평가했다. 이후 벨루노의 대신학교로 진학했다. 벨루노 대신학교 재학 중 예수회 입회를 원했으나, 당시 신학교 학장이었던 조수에 카타로시 주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2]

1935년 7월 7일 사제 서품을 받은 루치아니는 고향인 카날레다고르도에서 보좌 사제로 잠시 사목한 뒤, 1937년 벨루노 대신학교의 교수 겸 부학장이 되었다. 그는 교리 신학, 도덕 신학, 교회법, 성미술 등을 가르쳤다.

1941년 로마에서 1년간 머무르며 그레고리오 교황청립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 과정을 밟았다. 당시 벨루노 신학교 측은 그가 학업 중에도 학교에 나와 강의하기를 원했으나, 1941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가 직접 개입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는 안토니오 로스미니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논문(《안토니오 로스미니에 따른 인간 영혼의 기원》)으로 ‘대우등(magna cum laude)’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 2. 사제 서품과 교수 경력

1923년 펠트레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나중에는 벨루노의 대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이 시기에 예수회 입회를 원했으나, 당시 신학교 교장이었던 조수에 카타로시 주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35년 7월 7일, 루치아니는 벨루노의 성 피에트로 교회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처음에는 고향인 포르노 디 카날레(현재의 카날레다고르도)에서 보좌 사제로 봉직했다.

1937년에는 벨루노 대신학교의 교수 겸 부학장으로 임명되었다.[10] 그가 가르친 과목은 교의신학, 도덕 신학, 교회법, 성미술 등 다양했다.[13]

1941년부터 로마에 머물며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다.[10] 박사 과정을 이수하려면 최소 1년간 로마에 머물러야 했지만, 벨루노 신학교 측에서는 그가 학업 중에도 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기를 원했다. 이 문제는 1941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의 특별 허가로 해결될 수 있었다. 루치아니는 안토니오 로스미니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논문(''안토니오 로스미니에 따른 인간 영혼의 기원'')으로 1947년 최우수 등급(summa cum laude)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0]

펠트레 신학교 교수 시절(1947년)

2. 3. 주교와 총대주교

1958년 12월 15일, 알비노 루치아니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비토리오베네토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27일, 그는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직접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공동 서품 주교로는 지롤라모 보르티논 주교와 조아키노 무친 주교가 참여했다. 루치아니는 1959년 1월 11일에 교구를 맡으며 '겸손'(Humilitas)을 자신의 사목 표어로 정했다.[10] 그는 새 교구에 보낸 첫 연설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자이자 섬기는 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11]

주교로서 루치아니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회기에 참석했다. 1962년 4월 18일에는 공의회의 구조, 목적, 그리고 주요 교리 및 실질적 문제들을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공의회에 대한 노트"라는 제목의 사목 서한을 발표했다.[15]

1965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몬타네르 분열 문제를 겪었다. 사르메데의 작은 마을인 몬타네르 주민 대부분이 루치아니 주교와의 의견 충돌 끝에 가톨릭교회를 떠나 동방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갈등의 시작은 1966년, 루치아니 주교가 주민들이 원치 않는 존 가바 신부를 새 사제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인물을 부주임으로 임명하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루치아니 주교는 작은 마을에는 사제 한 명이면 충분하며, 사제 임명 권한은 오직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사제를 추천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했고, 결국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몬타네르 성당에서 성체를 옮기고 성당을 축복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했다.[4]

1966년에는 동아프리카의 부룬디를 방문하기도 했다.[16]

1969년의 알비노 루치아니


1969년 12월 15일, 루치아니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1970년 2월에 새로운 대교구를 맡았다. 같은 달, 그는 이전에 주교로 봉직했던 비토리오베네토 시로부터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10]

베네치아 총대주교로서 루치아니는 지역 내 빈곤층과 장애인 구제, 개발도상국 지원에 힘썼다. 그는 평소 "성직자가 되지 않았다면 저널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언론에 관심이 많았으며, 실제로 이 시기부터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 적극적인 언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청빈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총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신자들로부터 100만 이탈리아 리라의 기부금을 받았지만, "제가 이 땅에 왔을 때는 주머니에 5리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떠날 때도 5리라밖에 가지고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전액을 기부했다.

1972년, 루치아니가 총대주교로 있던 베네치아에서는 지역 성직자와 저소득층에게 저금리 융자를 제공하던 카톨리카 델 베네토 은행(Banca Cattolica del Veneto)이 금융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바티칸 은행(정식 명칭: 종교사업협회, IOR) 총재였던 미국 출신의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와 바티칸 은행의 주요 거래 은행인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로베르토 칼비 총재가 있었다. 마르친쿠스 대주교는 마피아, 프리메이슨의 비밀 조직 로지 P2와 연루된 인물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탈세와 불법 주식 거래를 목적으로 은행을 비밀리에 매각하려 했다. 루치아니 대주교는 이에 대해 바티칸에 항의했으나,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직접 임명된 인물이었기에, 교황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처했다. 이러한 그의 사려 깊은 대처는 바오로 6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그는 이듬해인 1973년 3월 5일 추기경회의에서 산 마르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의 겸손함은 널리 알려졌는데, 한번은 바오로 6세가 자신의 교황 전용 영대를 벗어 루치아니 추기경의 어깨에 직접 걸쳐주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화도 있다.

2. 4. 교황 선출

1978년 8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이 콘클라베에서 당시 '유력 후보'로 여겨졌던 주세페 시리 추기경이나 브라질 출신 알로이지우 로샤이데르 추기경 등을 제치고, 첫날 네 번째 투표에서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91]

루치아니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이중 이름인 ‘요한 바오로’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선택했다. 이는 선임 교황들인 교황 요한 23세의 선함과 교황 바오로 6세의 엄격함을 모두 본받아 그들의 개혁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91] 그는 로마 시민들을 향한 첫 연설에서 교황명 선택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요한 교황님께서는 여기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손수 저를 축성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그럴 자격이 없지만, 지금도 요한 교황님의 정신이 가득 남아 있는 베네치아에서,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그분의 뒤를 이었습니다. 한편 바오로 교황님께서는 저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몇 달 전에 성 마르코 광장에서 자신의 영대를 벗어 제 어깨에 올려놓으시며 2만 명 앞에서 제 얼굴을 붉히게 하셨습니다. 그토록 얼굴이 붉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요한 바오로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알아두시기를 바랍니다. 제게는 요한 교황님의 지혜로운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바오로 교황님처럼 준비된 사람도 아니며 그와 같은 교양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분들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기여하도록 노력할 것이니 여러분은 기도로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98]

요한 바오로 1세의 문장


교황 취임 후 바티칸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요한 바오로 1세(1978년)


또한, 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 뒤에 ‘1세’를 붙였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이름의 첫 교황은 후임자가 같은 이름을 사용(2세 등장)할 때까지는 서수를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요한 바오로 1세는 1978년 8월 26일 취임 당시부터 스스로 ‘1세’를 칭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과 바오로라는 교황명을 조합한 최초의 예이기 때문에', 또는 '바티칸의 쇄신 의지를 담아' 등의 해석이 있다.[91]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Il Papa del Sorriso|일 파파 델 소리소it (미소 교황)[99]와 Il Sorriso di Dio|일 소리소 디 디오it (하느님의 미소)[100] 등의 애칭으로 기억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생전에 자신이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훗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을 더 적합한 인물로 꼽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개인 비서였던 몬시뇰 마기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1세는 선출 직후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인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추기경[101]처럼 다른 좋은 후보들이 많은데, 그 사람은 생전에 바오로 6세께서 후계자로 꼽으셨지 않았었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3. 교황 재임 (1978년)

교황 바오로 6세는 15년의 재위를 마치고 1978년 8월 6일에 서거했다.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은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에 소집되었다. 고령으로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었던 추기경단 단장 카를로 콘팔로니에리가 루치아니를 처음 제안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루치아니는 1978년 8월 교황 선거의 네 번째 투표에서 선출되었다. 그는 선출되기 전 자신의 비서와 동료에게 만약 선출된다면 교황직을 거절할 것이며, 브라질에서 만났던 알로이시우 로르셰이데르 추기경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필리핀의 하이메 신 추기경은 그에게 "당신이 새 교황이 될 것입니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장마리 빌로 추기경이 선출 수락 여부를 묻자, 루치아니는 "하느님, 당신이 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답하며 수락했다. 선출 후 신 추기경이 경의를 표하자, 새 교황은 "당신은 예언자였지만, 나의 재위는 짧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페리클레 펠리치 추기경은 추기경단이 베네치아 총대주교 알비노 루치아니를 선출했으며, 그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고 발표했다.

1978년 8월 26일 선출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첫 모습


이는 교황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한 사례였다. 그는 자신을 주교로 임명한 교황 요한 23세와 자신을 베네치아 총대주교 및 추기경으로 임명한 교황 바오로 6세 두 전임자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중 이름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스로 '1세'라고 칭한 첫 교황이기도 했다. (2013년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은 교황명을 사용했지만 '1세'를 붙이지는 않았다.) 선출 후, 교황은 그의 형제에게 처음에는 교황 비오 11세를 기리기 위해 '비오 13세'를 고려했으나, 교회 내 전통주의자들이 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하여 포기했다고 밝혔다.

관찰자들은 그의 선출이 당시 추기경단 내의 분열된 세력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타협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당시 추기경단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해석을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 보수주의 성향으로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며 공의회 정신에 대해 보수적 해석이나 일부 되돌리기를 선호했던 주세페 시리 추기경 지지파.
  • 공의회 개혁에 대해 더 진보적인 해석을 선호하며, 조반니 베넬리 추기경을 지지했던 일부 이탈리아 추기경들 (베넬리는 독재적 경향이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점차 국제화되는 추기경단의 비(非)이탈리아 추기경들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카롤 보이티야 등).


콘클라베 이후 며칠 동안 추기경들은 대체로 요한 바오로 1세의 선출에 만족감을 표하며, 일부는 "하느님의 후보"를 선출했다고 기뻐했다. 아르헨티나의 에두아르도 프란시스코 피로니오 추기경은 "우리는 도덕적 기적의 증인이었다."라고 말했고, 마더 테레사는 새 교황에 대해 "그는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었고,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사랑의 햇살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바실 흄 추기경은 "일단 그것이 일어나자 완전히 옳다고 느껴졌습니다... 그의 이름을 종이에 쓸 때 마치 우리의 손이 인도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선출 직후인 1978년 9월 5일, 러시아 정교회 대표단의 지도자인 레닌그라드의 니코딤 대주교가 교황을 알현한 후 쓰러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새 교황은 즉시 그에게 다가가 기도했다.

3. 1. 교황직 간소화

요한 바오로 1세는 그 이름처럼 요한 23세바오로 6세의 진보적인 의지를 이어받아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교회를 적응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자주 밝혔다.

선출 직후, 요한 바오로 1세는 즉시 교황의 직책과 의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우선 공식 문서에서 교황 스스로 ‘짐(朕)’이라고 칭하던 관례를 깨고 ‘나’라고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비록 전통주의적 성향의 보좌진들에 의해 그의 연설문이 격식을 차린 형태로 수정되어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등에 실리기도 했지만, 이는 중요한 변화였다. 또한, 교황 전용 가마인 세디아 게스타토리아의 사용을 거절했으나, 신자들이 멀리서 교황을 보기 어렵다는 바티칸 당국의 설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6시간에 달하는 화려한 교황 대관식을 거부하고, 대신 간단한 양식의 교황 즉위 미사를 선택한 첫 교황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쥘 베른이나 피노키오 등을 인용하며 난해한 종교 용어나 라틴어 사용을 줄이고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표현을 사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요한 바오로 1세의 파격적인 시도들은 교황의 목자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일각의 보수파로부터는 "기독교의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반감을 사기도 했다.

3. 2. 반공주의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부터 요한 바오로 1세는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75년 그는 공산당이나 기타 좌익 단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사제들에게 징계를 내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18]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무기"로 여겼다.[37] 베네치아 총대주교로서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베네치아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며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그는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신앙을 위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37]

교황으로 선출된 후인 1978년 9월 20일, 요한 바오로 1세는 일반 알현 강론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 입장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그는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 발전을 위해 교회가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나라와 일치하며 레닌이 있는 곳에 예루살렘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정치 이념과 신앙의 혼동을 경계했다.

3. 3. 윤리 신학

영국의 연구원 폴 스팩맨은 루치아니를 "목회적이고 사회적인 열린 마음으로 완화된 교리적 엄격함"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그가 "온화하고 자비로운 가교 건설의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했다.[4]

'''피임'''

루치아니는 피임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비토리오 베네토의 주교였던 그는 피임약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당시 베네치아 총대주교였던 조반니 우르바니 추기경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다른 베네토 지역 주교들의 동의를 얻어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전달되었다.[29] 그러나 교황 바오로 6세가 인공 피임에 반대하는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을 발표하자, 루치아니는 공식적으로 이 문서를 옹호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칙 발표 4일 후 교구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러한 옹호와 상반되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기도 했으며[30], 1978년 5월에는 회칙 발표 10주년 기념 밀라노 회의에 연사로 초청받았으나 참석 자체를 거절했다.[29]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 그는 "지적 자만심과 불복종으로 교회의 피임 금지를 무시한 사람들에게는 엄격했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인내심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즉, 죄 자체를 용납하지는 않았으나,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려는 이들의 어려움에는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다.[5]

교황으로 선출되기 직전, 미국 의회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는 여성의 배란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째서 임신하지 않는 기간을 24일에서 28일로 하는 것이 죄가 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인간 생명'' 회칙이 오류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에서는 그가 피임 금지령을 해제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92] 그는 "하느님의 선물인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죄다"라는 기존의 입장에 반하여 "정말로 아이를 원하는 여성만이 임신해야 한다"는, 피임에 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92]

'''낙태'''

그의 저서 ''Illustrissimi'' 중 카를로 골도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루치아니는 낙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낙태가 하느님의 법을 위반하고 여성의 가장 깊은 열망에 반하며 그들을 깊이 괴롭히는 행위라고 주장했다.[31]

'''인공 수정'''

1978년,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인 루이스 브라운이 태어났을 때, 루치아니는 인공 수정이 여성을 "아기 공장"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32] 그러나 그는 아기를 간절히 원했던 부모를 비난하지는 않았다.[33] 그는 "인간의 생명을 원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저 또한 아기에게 최고의 축복을 보낸다. 부모에 관해서는, 나는 그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다. 주관적으로, 만약 그들이 올바른 의도와 선의로 행동했다면, 그들이 결정하고 의사에게 실행을 요청한 것에 대해 하느님 앞에서 큰 공덕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행위 자체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생명의 전달을 결혼 행위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이 규범에서 벗어날 만한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며, 시험관 수정의 윤리적 문제점을 지적했다.[34]

'''사실혼'''

1969년 인터뷰에서 루치아니는 사실혼 관계를 이혼보다는 덜한 악으로 보면서도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실혼이 합법적인 결혼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도, "명백히 병적인 가족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사례들이 있다. ... 합법적인 가족이 보호받고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적절한 모든 예방 조치를 통해 사실혼 관계에 일부 민사적 효력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인가?"라고 말하며, 특정 상황 하에서의 제한적인 법적 인정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35]

'''성(性)'''

1974년 인터뷰에서 그는 베네치아 총대주교로서 전통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인간에게 합당한 성은 이성과의 사랑의 일부여야 하며, 헌신과 불멸의 약속이 더해져야 한다"고 말했다.[36]

'''여성 사제 서품'''

1975년, 루치아니는 한 수녀 그룹과의 대화에서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질문할 것입니다. ... 사제직 자체는 어떻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도들에게만 목회적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가 이것을 잠시 동안만 유효하게 하려 했습니까, 아니면 당시 만연했던 여성의 열등함에 대한 편견을 고려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항상 유효하게 하려고 했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여성의 열등함에 대한 편견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서 그들은 항상 칭찬할 만한 인물들이며, 심지어 사도들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사제직은 영적인 권능을 통해 부여되는 봉사이지 우월함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여성들은 - 제 판단으로는 - 교회에서 다른, 상호 보완적이고 소중한 봉사를 수행하지만 "가능한 사제"는 아닙니다 ... 이것은 여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4]

'''사회 정의 및 기타'''

1971년 주교 시노드 제2차 정기 총회에서 루치아니는 부유한 국가들이 수입의 약 1%를 제3세계 국가에 "구호가 아닌, 빚진 것"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소비 중심적인 세상이 '개발 도상국'에 저지르고 있는 불의에 대한 보상"이자 "사회적 죄에 대한 배상"이라고 설명했다.[11]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 그는 이탈리아의 이혼 자유화를 지지하는 사제들과 갈등을 겪으며 일부를 정직시켰다.[4] 그러나 동시에 1974년 이탈리아 이혼 국민투표 자체에는 반대했는데, 실패할 경우 교회의 분열과 영향력 약화만 드러낼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4] 1975년에는 공산당이나 좌익 단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사제들에 대한 징계를 제안하기도 했다.[18]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가족 상담 진료소를 설립했으며[16], 1976년에는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물려받은 금십자가와 목걸이를 팔아 장애 아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19] 또한 동료 사제들에게도 귀중품을 팔아 기부에 동참하고 검소하게 살 것을 권고했다.[16] 1978년에는 베네치아 대교구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금지했다.[20]

교황 즉위 후에는 아르헨티나더러운 전쟁을 주도하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인권 상황을 비판했으며, 로마의 공산당 시장과 악수하고 "교회의 진정한 보물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진력하겠지만, 악인에 대해서는 교황의 교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사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3. 4. 종교 간 대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이었던 1964년 11월,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충실한 이슬람교도들이 교구 내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모스크를 지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 존엄성 선언을 설명하며 "로마에는 4,000명의 이슬람교도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를 지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언급했다.[35]

3. 5. 보편적 성화의 부르심

루치아니는 비토리오 베네토의 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보편적 성화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된 초대와 같았다. 그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산다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루치아니는 성인이 되는 데 장벽은 없다고 보았으며, 1962년 1월 6일 설교에서 이 주제를 다루며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참된 성인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자들을 성인으로 초대하고 동시에 의무를 부여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곧 "나의 하느님, 저는 거룩해지고 싶습니다. 저는 거룩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38]

3. 6. 자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하느님자비에 대해 세 차례 연설했다.

1978년 9월 13일 일반 알현에서 교황은 자비의 핵심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며, 와의 싸움과 성덕 추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매우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계시며", "하느님은 내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하신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회 역시 선해야 하며, 모든 이에게 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39]

1978년 9월 24일 삼종기도 연설에서는 세상을 더 정의롭게 만들고 사회 전체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에서 자선과 자비로운 행동을 통해 선행을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교황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온유함과 사랑으로 가득 찬 선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십자가에서 박해자들을 용서하고 이해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언급하며, 이를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사회에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40]

1978년 9월 27일 일반 알현에서 교황은 다시 한번 자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하느님을 인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제공할 수 있는 "무한한 선"으로 묘사했다. 교황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며,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형제자매 간의 용서가 사람들 사이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황은 일곱 가지 육체적, 영적인 자비의 행위를 언급하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침이 되지만 "목록은 완전하지 않으며, 시대가 변하고 세계적인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의자비와 연결된 자선에 더해진다고 결론지었다.[41]

3.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해석

루치아니는 비토리오 베네토의 주교 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1965년)의 모든 회기에 참석했다. 그는 공의회가 현대 사회의 상대주의적 경향에 맞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반한 "기독교적 낙관주의"를 강조하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세속주의에 대응하여 "신앙의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무지를 극복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치아니는 자신의 교구 신자들을 공의회에 대한 입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보았다.

  • 트리엔트 공의회는 아니더라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개선하는 긍정적인 계기로 보고, 공의회의 현대화(aggiornamentoit)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 "실제로 공의회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게 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공의회, 즉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한 급진적인 돌진을 계획하는 작은 그룹."[42]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그는 자신의 교황직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계속해서 실현해 나가는 것을 꼽았다.[43]

종교의 자유 문제에 관해서는, 루치아니는 공의회의 선언문인 Dignitatis humanaela를 언급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한 참된 종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고, 이 진리가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여러 이유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종교를 고백할 자유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의 선택은 자유로워야 하며, "더 자유롭고 진지한 선택일수록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더욱 존경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권리이며, 천부적인 권리이다. 권리는 항상 의무와 함께 온다. 비가톨릭 신자는 자신의 종교를 고백할 권리가 있으며, 나는 개인 시민, 사제, 주교, 국가로서 그들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며,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했다.[44]

4. 갑작스러운 죽음과 음모론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황직에 오른 지 불과 33일 만인 1978년 9월 29일 새벽, 자신의 침실에서 갑작스럽게 선종한 채 발견되었다.[102] 바티칸 당국은 공식적으로 사인을 심근경색으로 발표했으나,[56] 그의 매우 짧았던 재위 기간과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의문과 함께 음모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국 작가 데이비드 얄롭은 그의 저서 《신의 이름으로?》를 통해, 교황이 바티칸 은행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발한 은행 총재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 국무장관 장 비요 추기경, 비밀결사조직 프로파간다 두에(P2) 관련 인물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103] 이러한 음모론은 교황의 시신 발견 상황에 대한 초기 발표의 혼선, 부검 미실시, 유품 분실 등 여러 의혹과 맞물려 확산되었다. 교황의 죽음을 둘러싼 구체적인 정황과 여러 음모론, 그리고 진상 규명 노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4. 1. 의문의 죽음

바티칸 지하 동굴에 있는 요한 바오로 1세의 무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황직에 오른 지 33일 만인 1978년 9월 29일 새벽, 자신의 침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교황은 침대에 앉아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콧등에 안경을 얹은 모습이었다.[102] 바티칸 당국은 예순다섯 살의 교황이 전날 밤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 발작으로 갑작스럽게 선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그 근거로, 선종 전날 저녁 식사 중 교황이 흉부 통증을 호소하며 평소 복용하던 약을 준비해 달라고 수녀에게 부탁했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발견 당시 손에는 영성 서적인 《준주성범》을 들고 있었다고 밝혔다.[102]

그러나 교황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의문과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영국 작가 데이비드 얄롭은 그의 저서 《신의 이름으로?》에서 교황이 죽기 전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준주성범이 아니라, 다음날 파면시키려 했던 비밀결사조직 프로파간다 두에(P2) 소속원 명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명단에는 당시 바티칸 은행 총재였던 마르친쿠스 대주교와 국무장관 장 빌로 추기경 등 바티칸 내부의 고위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얄롭은 이들 '바티칸 마피아'(마르친쿠스 대주교, 빌로 추기경, 은행가 로베르토 칼비와 미셸 신도나, P2 지도자 리치오 겔리 등)가 교황의 개혁 조치에 반발하여 그를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03]

교황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바티칸의 공식 발표와 달리, 교황의 개인 비서가 아닌 빈첸차 타파렐 수녀와 마르게리타 마린 수녀였다. 수녀 마르게리타 마린의 증언에 따르면, 1978년 9월 29일 오전 5시 15분경, 평소처럼 성물실에 준비해 둔 커피를 교황이 마시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빈첸차 수녀가 교황의 침실로 갔다가 숨진 교황을 발견하고 급히 마린 수녀를 불렀다.[63] 마린 수녀는 교황이 침대에 약간 미소를 띤 채 누워 있었으며, 머리맡 독서등이 켜져 있었고, 두 개의 베개가 등을 받치고 다리는 뻗어 있었으며, 팔은 침대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교황은 잠옷 차림이었고, 손에는 몇 장의 타자된 종이를 쥐고 있었으며, 안경은 코 위에 놓여 있었다. 마린 수녀는 교황의 손이 차가웠고 손톱이 검게 변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61][64][62] 바티칸이 초기에 발견자를 교황의 비서인 로렌치와 매기라고 발표하고 발견 시각도 실제보다 늦은 오전 5시 30분으로 알린 것은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022년 시복 이후 바티칸 묘소에 안치된 요한 바오로 1세의 묘


사망 전날 밤의 정황에 대해서도 상반된 설명이 존재한다. 바티칸은 교황이 저녁 식사 중 흉통을 호소했다고 밝혔으나,[102] 언론인이자 시성 절차 부심사관인 스테파니아 팔라스카는 2017년 저서 "교황 루치아니, 죽음의 연대기"에서 교황이 사망 몇 시간 전과 전날 저녁(저녁 기도 중 약 5분간)에도 가슴 통증을 느꼈지만, 주치의를 부르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61][62] 팔라스카는 수녀들과의 인터뷰 및 바티칸 사도 문서 보관소 문서를 근거로 교황이 1978년 9월 28일 늦은 저녁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결론지었다.[62] 또한, 사망 전날 밤 10시경, 교황은 로마에서 네오 파시스트 청년들이 공산당 신문 ''L'Unità''를 읽던 젊은이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존 매기 주교에게 "어린 사람들조차 서로 죽이고 있습니다"라며 한탄한 뒤, 침실로 물러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었다고 전해진다.[55]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자신의 이른 죽음을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 비서였던 몬시뇰 마기는 교황이 건강 문제로 오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즉위 며칠 후 중요한 종교 행사가 열리는 멕시코행 비행기표를 보여주자 "로마를 떠나지 않겠네. 곧 가게 될 것이야"라며 후임자에게 줄 것을 당부했다고 회고했다.[104]

교황 선종 후 바티칸의 대응은 여러 의혹을 낳았다. 시신 발견 직후, 국무장관 빌로 추기경은 즉시 의사단을 부르지 않고 측근에게 먼저 연락했으며, 오전 6시가 넘어 도착한 의사단 차석 레나토 부조네티는 부검 없이 사인을 급성 심근경색으로 단정했다. 또한, 시신 발견 15분도 채 되지 않아 장례 업체에 연락이 갔고, 명확한 사인 규명 없이 서둘러 방부 처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의 안경, 슬리퍼, 손에 들고 있던 문서(인사 이동 명단으로 추정), 유언장 등이 사라졌는데, 특히 전날 교황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빌로 국무장관이 이를 가져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바티칸의 신속하지만 의문스러운 사후 처리와 정보 통제는 '증거 은폐' 및 '정보 조작'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유력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10월 1일 자 지면에서 부검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부검은 방부 처리가 끝난 뒤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1978년 10월 교황 선거를 앞두고 추기경들은 교황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의사들에게 외상 흔적 여부 등을 묻는 서면 질문을 보내 사인을 확인하려 했다.[64][65] 부조네티 박사는 1979년 10월 9일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교황이 흉골 상부 통증을 겪었다고 밝혔다.[64]

요한 바오로 1세의 초상이 새겨진 1000 리라 은화 (1978년)


스테파니아 팔라스카와 국무원장 추기경 피에트로 파롤린 등은 이러한 음모론들을 "누아르적 재구성" 또는 "무수한 이론, 의혹, 추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며 자연사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61] 팔라스카는 교황이 사망 당일 저녁 조반니 콜롬보 추기경과 30분간 통화하며 살레시오회 총장 에지디오 비가노를 후임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데 동의를 구하려 했다는 마르게리타 수녀의 증언도 소개했다.[54]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으며, 스페인,[57] 자이르,[58] 레바논[59] 등 여러 국가에서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장례식은 1978년 10월 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카를로 콘팔로니에리 추기경의 집전으로 거행되었으며, 그는 추도사에서 고인을 "교회를 잠시 밝힌 혜성"에 비유했다. 교황의 유해는 바티칸 묘소에 안장되었다.[60]

4. 2. 음모론

리치오 젤리(가운데)와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왼쪽). 젤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사망 음모론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교황 즉위 33일 만인 1978년 9월 29일 새벽, 침대에 앉은 채 선종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102] 바티칸 당국은 공식적으로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 마비를 사인으로 발표했으나,[56] 그의 짧은 재위 기간과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음모론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작가 데이비드 얄롭은 그의 저서 《신의 이름으로?》(In God's Name?)에서 요한 바오로 1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103] 얄롭은 당시 바티칸 은행 총재였던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 국무장관 장 비요 추기경, 은행가 로베르토 칼비, 미셸 신도나, 그리고 비밀결사조직 프로파간다 두에(P2)의 지도자 리치오 젤리 등이 교황의 죽음에 연루되었다고 지목했다.[103] 얄롭에 따르면, 교황은 바티칸 은행의 개혁을 추진하며 마르친쿠스 총재 등의 해임을 결정했고, 선종 당시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영성 서적이 아니라 다음날 파면하려 했던 P2 소속원 명단(마르친쿠스, 비요 포함)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 중 누군가가 교황에게 치명적인 약물을 투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03]

이러한 음모론은 여러 의혹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 발견 상황의 혼선: 교황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수녀들[63] 혹은 교황 비서들[62]), 발견 시각이 언제인지에 대해 바티칸의 초기 발표가 엇갈리고 수정되었다.
  • 부검 미실시 및 성급한 방부 처리: 명확한 사인이 규명되기 전에 부검 없이 서둘러 시신 방부 처리가 진행된 점[64]은 증거 인멸 시도라는 의혹을 샀다. 이탈리아 유력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10월 1일 자 신문에서 부검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 사라진 유품: 교황의 안경, 슬리퍼, 유언장, 그리고 인사 이동 관련 문건으로 추정되는 서류 등이 선종 직후 사라졌으며, 비요 추기경이 이를 가져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마르친쿠스 대주교의 행적: 평소와 달리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선종 당일 이른 아침에 교황의 침실 근처에 있었다는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음모론의 배경에는 요한 바오로 1세가 추진하려던 바티칸 은행 개혁과 이에 반발한 세력, 특히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와 프로파간다 두에(P2), 마피아 등과의 유착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혹들은 미국 영화대부 3》(1990)의 일부 줄거리에 영감을 주었으며, 포르투갈 작가 루이스 미겔 로샤의 소설 《P2》(O Ultimo Papa)에서도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다.

한편, 2017년 언론인이자 요한 바오로 1세 시복 조사를 위한 부심사관이었던 스테파니아 팔라스카는 저서 "교황 루치아니, 죽음의 연대기"를 통해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그녀는 바티칸 문서와 교황을 발견한 수녀 마르게리타 마린 등의 증언을 토대로, 교황이 선종 전날 밤 가슴 통증을 느꼈으나 스스로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했으며,[61] 심장 마비로 자연사했다고 결론지었다.[62] 마린 수녀는 교황 발견 당시 그의 손이 차갑고 손톱이 검게 변했으며,[61] 침대에 약간 미소를 띤 채 안경을 쓰고 타자된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고 상세히 증언했다.[64] 국무원장 추기경 피에트로 파롤린은 이 책의 서문에서 여러 음모론을 "누아르적 재구성"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61]

4. 3. 진상 규명 노력



1978년 9월 29일, 교황 즉위 35일째 되던 날, 요한 바오로 1세는 침대에서 독서 자료와 켜진 스탠드가 놓인 채 숨진 채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전날 밤 발생한 심장 마비로 발표되었다.[56]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 직후 바티칸 은행의 불투명한 재정에 대한 개혁 의지를 보인 점이 있다. 특히 마피아와의 유착설이 돌았던 마르친쿠스 총재의 해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55] 마르친쿠스는 과거 은행 매각 문제, 로지 P2의 리치오 젤리 대표 등과의 관계, 위조 공채 발행 등으로 FBI의 수사 대상이 되는 등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55] 또한, 요한 바오로 1세는 장-마리 비요 국무 장관을 비롯한 바티칸 은행 부패 관련자들의 해임을 선종 직전에 결정했으며, 이 해임 명단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이 돌았다.[55]

교황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 중 하나로, 언론인이자 요한 바오로 1세 시성 절차의 부(副)심사관인 스테파니아 팔라스카는 2017년 "교황 루치아니, 죽음의 연대기"라는 책을 출판했다.[61] 팔라스카는 이 책에서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하기 몇 시간 전과 전날 저녁에 가슴 통증을 호소했지만, 주치의를 부르지 않았다고 밝혔다.[61] 그녀는 교황을 발견한 수녀들과의 인터뷰 및 바티칸 사도 문서 보관소의 문서를 통해 요한 바오로 1세가 1978년 9월 28일 늦은 저녁 심장 마비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62] 국무원장 추기경 피에트로 파롤린은 이 책의 서문에서 여러 음모론을 "누아르적 재구성"에 불과하며,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무수한 이론, 의혹, [그리고] 추측"을 낳았다고 언급했다.[61]

교황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수녀 중 한 명인 마르게리타 마린 수녀의 진술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녀의 2009년 증언에 따르면, 빈첸차 타파렐 수녀가 1978년 9월 29일 오전 5시 15분경 교황이 성물실에 준비된 커피에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보고 그의 침실로 갔다가 숨진 교황을 발견했고, 즉시 마린 수녀를 불렀다.[63][64] 이는 교황의 비서인 로렌치와 매기가 최초 발견자라는 바티칸의 초기 발표와는 다른 내용이다.[62] 마린 수녀는 교황이 "침대에 약간 미소를 띤 채 누워 있었다"고 진술했다. 머리맡 독서등은 켜져 있었고, 두 개의 베개가 등을 받치고 있었으며, 다리는 뻗어 있었고 팔은 침대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 교황은 잠옷 차림이었고 손에는 몇 장의 타자된 종이를 쥐고 있었으며, 안경은 코 위에 놓여 있었다.[64] 마린 수녀는 교황의 손이 차가웠고 손톱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덧붙였다.[61]

마린 수녀는 또한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 전날 저녁 7시 30분경 약 5분간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레나토 부조네티 박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진술했다.[62] 부조네티 박사는 교황 사망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62] 이후 1978년 10월 교황 선거 전에 추기경들은 교황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의사들에게 외상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서면 질문을 보내 자연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64][65] 부조네티 박사는 1979년 10월 9일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에게 보낸 상세 보고서에서 요한 바오로 1세가 겪은 통증이 흉골 상부 부위에 있었다고 밝혔다.[64]

한편, 마린 수녀는 2017년 발언에서, 교황이 사망한 날 저녁 조반니 콜롬보 추기경에게 30분간 전화하여 살레시오회 총장 에지디오 비가노를 자신의 후임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데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54]

5. 유산과 평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여러 면에서 '최초'와 '마지막' 기록을 남긴 교황이다. 그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전통적인 교황 대관식을 거부하고 교황관 착용을 포기한 최초의 교황이었으며[52], 대신 간소화된 교황 즉위식을 가졌다. 또한 교황명으로 두 개의 이름(요한과 바오로)을 합쳐 '요한 바오로'를 사용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그의 후임자인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 역시 같은 이름을 선택했다. 한편, 그는 교황의 이동 시 사용되던 ''세디아 게스토리아''(Sedia Gestatoria)를 이용한 마지막 교황으로 기록되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뛰어난 소통가이자 작가로 평가받는다. 추기경 시절 집필한 ''일루스트리시미(Illustrissimi)''는 역사적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 모음집으로, 예수, 다윗 왕, 이발사 피가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피노키오 등 다양한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 크리스토퍼 말로 등에게 보내는 편지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9] 그는 박식했으며, 매일 아침 베네토 지역 신문을 포함한 여러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54]

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개인적인 따뜻함과 친근함이었다. 선출 직후 성 베드로 광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의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언론 역시 그의 매력에 주목했다. 그는 능숙한 웅변가이기도 했다. 1978년 8월 27일, 교황 재위 첫날 행한 삼종기도 연설은 그의 자연스러운 친근함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53] 그의 모토는 라틴어 단어 Humilitas|la('겸손')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가 교황직의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비평가들은 그가 피노키오를 언급하며 설교한 것을 교황 비오 12세교황 바오로 6세의 학문적인 담론과 비교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바티칸 내부 세력의 음해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작가 데이비드 얍(David Yallop)은 그의 저서 ''신의 이름으로''(In God's Name)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했으며[50], 존 콘웰(John Cornwell) 역시 일부 고위 성직자들이 "그들은 피터 셀러스를 선출했다"고 말하며 그를 폄하했다고 전했다.[50] 또한 그가 수십 년 만에 외교관(예: 교황 비오 11세, 요한 23세)이나 로마 교황청 관료(예: 비오 12세, 바오로 6세) 출신이 아닌 첫 교황이라는 점에서 오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요한 바오로 1세가 결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교황청 국무원 차관이었던 주세페 카프리오 추기경은 그가 새로운 역할을 신속하게 받아들이고 자신감 있게 수행했다고 평가했다.[51] 요한 바오로 1세 스스로도 교황직의 가능성이 자신을 두렵게 하여 다른 추기경들의 격려가 필요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바티칸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마르게리타 마린 수녀는 2017년 인터뷰에서, 요한 바오로 1세가 전임자 바오로 6세와 달리 아침 미사에 수녀들을 자신의 아파트 예배당으로 초대했으며, 특히 베네토 출신 수녀들과는 편안하게 소통하기 위해 베네치아 방언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의 유머 감각이 뛰어나, 신문에 실린 자신의 사진을 보며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나를 어떻게 찍었는지 보시오"라고 농담하며 수녀들과 웃곤 했다고 전했다.

5. 1. 시복

그의 짧은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시성되거나 복자로 선포된 사람은 없었지만, 호세 그라스 이 그라놀예르스, 후안 비센테 셍고티타-벵고아 라수엔, 그리고 주세페 베스킨은 1978년 9월 22일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다.[46][47][48]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성 절차는 1990년 4명의 추기경을 포함한 226명의 브라질 주교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직접 청원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66]

2002년 8월 26일, 빈첸초 사비오 주교는 시성 절차를 시작하기 위한 문서와 증언을 수집하는 예비 단계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2003년 6월 8일, 성인 시성성은 이 작업에 동의했고, 6월 17일에는 복자 절차의 주관 교구를 로마에서 벨루노-펠트레로 이전했다. 이후 "반대 없음(nihil obstat)"을 선언하며 요한 바오로 1세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했다.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추기경이 주재하여 벨루노 대성당에서 교구 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67][68] 이 교구 조사는 2006년 11월 11일 벨루노에서 종료되었고, 수집된 모든 증거는 성인 시성성으로 보내져 2008년 6월 13일에 유효성을 인정받았다. 같은 날 바티칸은 요한 바오로 1세 시복 절차의 "로마 단계"를 시작하여 교구 조사에서 수집된 문서와 증언을 평가하기 시작했다.[69]

요한 바오로 1세의 시복 관련 문서인 포지치오(Positio, 전기 및 덕행 조사 자료집)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7일에 성인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에게 전달될 예정이었으나, 지지자들이 문서를 재확인하기를 원하면서 지연되었다. 2014년 7월 20일,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벨루노 미사에서 시복 절차가 진행될 것이며 포지치오가 2014년 9월에 전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70][71] 그러나 총 3600페이지에 달하는 5권의 포지치오는 2016년 10월 17일에야 시성성에 제출되었다.

2015년 8월 27일, 주세페 안드리치 주교는 요한 바오로 1세가 "곧" 시복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카날레 다고르도에서 열린 교황 선출 37주년 기념 미사 설교에서 교회 당국이 루치아니의 영웅적 덕행 조사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포지치오 작성 완료 후,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친필 카드를 포함한 여러 증언 메시지를 받았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기적 요건 면제를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72][73]

2017년 6월 1일, 신학자들은 요한 바오로 1세가 영웅적 덕행의 삶을 살았다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74] 추기경 및 주교 위원회 역시 2017년 11월 7일에 만장일치로 이를 승인했다.[75] 교황 프란치스코2017년 11월 8일, 그의 사추덕과 신학적 덕에 따른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여 요한 바오로 1세를 가경자로 선포했다.[19][93][94]

시복을 위해서는 그의 중재로 인한 최소한 하나의 기적이 인증되어야 했다. 시성에는 두 번째 기적이 필요하지만, 교황은 이 요건을 면제할 수 있다.[76] 201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소녀에게 일어난 치유 사례가 잠재적 기적으로 보고되었다.[77] 부청원인 스테파니아 팔라스카는 ''아베니레'' 기고를 통해, 2019년 10월 31일 로마 의학 자문가들이 이 소녀의 치유가 의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전했다. 신학자들 또한 2021년 5월 6일 이 치유가 요한 바오로 1세의 중재 덕분이라고 승인했다. 팔라스카는 성인 시성성 위원회가 10월에 이 사건을 논의할 예정이며, 2022년 시복이 유력하다고 덧붙였다.[78]

교황 프란치스코2021년 10월 13일 이 기적을 인정하는 교령을 승인했으며[95], 이에 따라 요한 바오로 1세는 2022년 9월 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될 수 있게 되었다.[79][96] 시복 발표 후, 기적의 주인공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뇌염으로 인한 염증성 뇌병증을 앓던 11세 소녀의 회복임이 밝혀졌다.[80]

이전에 주세페 데노라 디 알타무라가 요한 바오로 1세의 중재로 암이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며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기적 조사가 진행되었으나,[81] 2015년 4월 24일 로마 의료 위원회는 이를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82]

시복 절차의 포스툴라토르(청원인)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 주교 엔리코 달 코볼로였으며, 이후 추기경 베냐미노 스텔라가 임명되었다. 스테파니아 팔라스카는 현재 부청원인이다.[83]

5. 2. 후임 교황들의 평가

카날레다고르도에 위치한 교황 루치아니 박물관


카롤 보이티야는 1978년 10월 16일 콘클라베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다음 날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단과 함께 미사를 집전한 후, 첫 ''우르비 에트 오르비'' 메시지를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전임자 요한 바오로 1세에게 다음과 같이 경의를 표했다.[87]

: 요한 바오로 1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마치 어제 그가 교황의 옷을 입기 위해 우리 회의에서 나왔던 것처럼 보입니다.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죠. 그러나 그의 사역의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서 나왔고 삼종기도 전에 마지막 주일 연설에서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랐던 자선의 따뜻함, 아니, "사랑의 풍성한 유출"은 어떠했습니까. 이는 또한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그의 공개 알현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보낸 그의 현명한 지시로도 확인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9월 28일, 요한 바오로 1세 선종 30주년을 맞아 주간 삼종기도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88]

: 그의 이러한 덕성 덕분에 루치아니 교황은 불과 33일 만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항상 가족의 추억과 대중의 지혜에서 얻은 실생활의 사건들을 언급했습니다. 그의 단순함은 견고하고 풍부한 가르침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으며,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방대한 지식을 통해 교회 및 세속 작가들의 수많은 인용문으로 이를 장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지역 출신으로 성 마르코 좌와 성 베드로 좌의 전임자였던 성 교황 비오 10세의 발자취를 따른 비할 데 없는 교리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같은 강론에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아이처럼 느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믿습니다. 저는 주님과 주님께서 제게 계시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믿음의 깊이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를 교회와 세상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모든 사람, 특히 작고 '소외된'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게 해준 그의 겸손의 본보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여종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간구합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6년 저서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에서 요한 바오로 1세의 저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하며, 특히 1978년 9월 6일 일반 알현에서의 발언을 인용했다.[89]

: 알비노 루치아니가 주님께서는 어떤 일들이 청동이나 대리석에 새겨지는 것보다 먼지에 새겨지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던 설교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록이 남아있더라도 그 공로는 오직 하느님의 것임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한편,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바오로 1세의 자세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교황명을 정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바티칸 내부 사정에 상대적으로 어두웠고 냉전 시기 동구권 조국 폴란드의 민주화 등 반공산주의 활동에 주력하며 교리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1세가 추진하려던 교회 내 개혁 과제들이 다소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5. 3. 대중문화


  • 2006년, 이탈리아 공영 방송 서비스인 RAI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삶에 대한 TV 미니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제목은 ''Papa Luciani: Il sorriso di Dio''(직역: "교황 루치아니: 신의 미소")였다. 이 작품에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네리 마르코레가 주연을 맡았다.[90]
  • 교황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은 1990년 범죄 영화 ''대부 3''에서 묘사되었는데, 바티칸 은행과 관련된 독차로 살해되는 내용이 나온다.
  • 마크 E. 스미스는 연극 ''안녕! 루치아니: 요한 바오로 1세의 삶과 법전''과 노래 ''안녕! 루치아니''를 요한 바오로 1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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